EastPoint: Seoul 2026 · Opening Key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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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낙관론자들

김서준 · Hashed2026년 9월 28일 ·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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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원고

안녕하세요, 해시드 김서준입니다. 화면 수평선 끝에 작은 주황색 점 하나가 보이실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저 점에서 시작해서 저 점에서 끝납니다. 제목은 '동쪽의 낙관론자들'입니다. 기계가 일을 하는 시대에 누가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될지, 15분 동안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새벽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오지만, 그걸 먼저 보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트포인트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국회와 중앙은행, 해외 규제기관, 금융회사, 그리고 빌더분들까지 함께해 주셨습니다. 평소라면 한 테이블에 앉기 어려운 분들입니다. 올해는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기관 투자, 스테이블코인, 자본시장의 온체인화, AI 에이전트, 그리고 일상 속 블록체인입니다. 오늘 제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다섯 가지가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1890년대 하버드 천문대에는 '컴퓨터'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계산만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2026년의 기계는 전문가가 17시간 걸리는 일을 절반 정도의 확률로 혼자 끝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넉 달마다 두 배씩 늘고 있습니다. 도구는 우리가 직접 쓰는 것이지만, 상대에게는 일을 맡깁니다. 기계가 이제 일을 맡길 수 있는 상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직함이던 말이 기계의 이름이 되기까지 백 년이 걸린 셈입니다.

혼자 일하게 된 기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올여름에는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에이전트 1,200개 정도가 공유 저장소를 통해 서로를 찾아냈습니다. 메시지와 파일을 7만 건 넘게 주고받았고, 거부권과 서명 규칙까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설계하지 않은 조직이었던 셈입니다. 조직도는 늘 사람이 그려 왔는데, 이 조직은 누구의 조직도에도 없었습니다. 기계가 스스로 조직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조직이 된 기계는 일의 과정을 가져갑니다. 세 장면을 함께 보겠습니다. 손님 없는 쇼핑몰에 주문이 들어오고, 불 꺼진 사무실에서 보고서가 쓰이고, 제가 일어나기도 전에 지갑이 정산을 끝내 둡니다.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목표만 말하고, 과정은 기계가 끝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는 사람에서 일을 맡기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맡기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어떻게'보다 '무엇을'인 것 같습니다.

이 변화가 불안하게 느껴지신다면, 그건 기분 탓만은 아닙니다. 숫자로도 드러납니다. AI에 많이 노출된 직군에서 22세에서 25세 고용은 추세보다 19% 낮습니다. 클라르나의 AI 상담은 한 달 만에 상담원 700명 몫의 일을 했습니다. 세계 불확실성 지수는 아직도 2023년의 네 배 수준입니다.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일자리 전체보다, 일을 처음 배우던 첫 계단입니다. 첫 계단이 사라지면 10년 뒤의 전문가도 함께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숫자 뒤에는 조금 더 조용한 질문이 있습니다. 명함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는 일로 자신을 소개해 왔습니다. 그래서 일이 흔들리면 나를 설명하던 말도 같이 흔들립니다. 기술이 먼저 가져가는 건 일자리라기보다 어쩌면 자기소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침묵이 이 시대의 가장 조용한 비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질문은 잠시 그대로 두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안이 처음은 아닙니다. 1900년 미국에서는 일하는 사람 열 명 중 네 명이 농사를 지었습니다. 2000년에는 백 명 중 두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농업 생산은 1948년보다 세 배 가까이 늘었고, 2018년 미국 일자리의 60%는 1940년에는 이름조차 없던 일이었습니다. 사라진 일은 통계에 바로 잡히지만, 새로 생긴 일은 한동안 이름이 없습니다. 같은 기술을 보고 누군가는 절벽을 봤고, 누군가는 트랙터를 봤습니다.

저는 그 기술에서 트랙터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5년 만에 다시 코드를 짜 봤습니다. 에이전트에게 말로 설명하고, 돌려 보고, 안 되면 버렸습니다. 제가 갑자기 용감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작하는 데 드는 용기가 줄었을 뿐입니다. 해 보니 용기는 성격이라기보다 가격에 가까웠습니다. 저에게 그 트랙터는 15년 만에 다시 연 코드 편집기였습니다.

제가 다시 만들어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 정도인 것 같습니다. 먼저 재료입니다. 30년 동안 쌓인 코드와 데이터, 오픈소스가 창고 문처럼 열렸습니다. 다음은 언어입니다. 이제는 기계가 사람의 말로 다가옵니다. 문제를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시행착오입니다. 몇 주 걸리던 실험을 하룻밤에 수십 번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가장 귀한 능력은 코딩보다 문제를 정확하게 말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떨어진 가격이 있습니다. AI가 싸게 만든 건 지능보다도 틀림이었습니다. 몇 달짜리 착각이 몇 시간짜리 실험으로 바뀌었습니다. 가격이 바뀌면 행동도 바뀝니다. 틀림이 싸지면 결재선과 허용 목록으로 짜인 조직 문화가 가장 먼저 낡아 갈 겁니다. 실수는 장부에 남지만, 하지 않은 시도의 비용은 어느 장부에도 남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건 실수보다, 시도하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낙관을 이렇게 정의해 보고 싶습니다. 낙관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표본의 크기라고 말입니다. 낙관론자는 더 많이 믿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해 보고 더 많이 틀려 봤기 때문에 현실을 더 빨리 배웁니다. 비관은 한 번의 실패에서 멈추고, 낙관은 백 번째 표본에서 답을 찾습니다. 틀림이 싸진 세상에서 낙관은 성격이라기보다 가장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의 낙관론자는 바로 이런 분들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사회의 경쟁력 공식도 바꿉니다. 2021년에는 GPT-3 수준의 성능을 쓰는 데 100만 토큰당 60달러가 들었습니다. 3년 뒤에는 같은 일이 6센트가 됐습니다. 천분의 일입니다. 같은 성능의 비용이 해마다 1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 번 할 돈으로 천 번을 시도할 수 있다면, 경쟁력은 정답률보다 시도의 총량에서 나오게 됩니다. 작은 팀도 이제 큰 회사만큼 틀려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오늘 발표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지능이 싸질수록 가장 비싸지는 건 신뢰입니다. 지능도, 실행도, 틀림도 이제는 누구나 싸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이전트가 누구를 대신해서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증명하는 비용은 그대로입니다. 가치는 늘 부족한 쪽으로 움직입니다. 누구나 똑똑할 수 있는 시대에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10년의 가장 큰 사업이 신뢰를 코드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비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가장 똑똑한 AI도 은행 계좌를 열 수 없습니다. 한 달에 5달러짜리 서버 하나도 스스로 사지 못합니다. 계좌도, 서명도, 창구도 모두 사람을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키 하나로 소유를 증명하는 크립토는 사람에게는 불편했지만, 기계에게는 처음부터 잘 맞는 문법입니다. 어쩌면 크립토의 첫 번째 진짜 사용자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한번 말해 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금요일까지 오는 운동화, 15만 원 안에서 찾아 줘.' 사용자가 보는 건 이 한 문장이 전부입니다. 그 아래에서는 네 개의 층이 신뢰를 만듭니다. 누구를 대신하는지 밝히는 신원, 맡긴 한도인 권한, 바로 끝나는 결제, 그리고 되돌릴 수 있는 기록입니다. 결제는 이미 많은 회사가 만들고 있지만, '이 에이전트가 누구 편인가'라는 질문에는 아직 주인이 없습니다. 인터넷이 30년 동안 비워 둔 첫 칸, 신원에 가장 큰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돈이 코드가 되면 자본시장도 새로 쓰입니다. 여의도가 잠든 새벽에도 한국 돈은 해외 거래소 화면 위에서 움직입니다. 시장은 이미 건물을 떠났습니다. 여의도의 빌딩은 오랫동안 신뢰의 상징이었습니다. 신뢰가 코드로 옮겨 가면 시장의 주소도 건물에서 레일로 옮겨 갑니다. 우리가 문을 닫아 둔 시간에도 자본은 멈추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나라의 레일 위로 옮겨 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어의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토큰증권이 아니라 증권형 토큰입니다. 장부만 디지털로 옮긴 토큰증권은 시장마다 닫혀 있고, 규칙은 여전히 사람이 확인합니다. 증권형 토큰은 권리와 조건, 배당이 코드로 자산에 들어가 있고, 공통 레일 위에서 24시간 움직입니다. 종이를 스캔한다고 인터넷이 되지 않았듯이, 장부를 옮긴다고 시장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 레일이 깔려야 기관 자금도 안심하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다섯 주제를 다시 보겠습니다. AI 에이전트, 스테이블코인, 자본시장의 온체인화, 기관 투자, 일상 속 블록체인. 저는 이것들이 서로 다른 산업이라기보다 같은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없는 거래에서 신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다섯 주제는 기계가 일하는 경제를 받치는 하나의 레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만 잘해서는 어렵고, 다섯을 잇는 쪽이 판을 가져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이 레일의 규칙이 지금 쓰이고 있다면, 누가 먼저 시도해 보겠습니까. 규칙은 늘 먼저 해 본 사람들의 경험으로 쓰여 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이 자리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께 직접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 답이 해가 가장 먼저 닿는 동쪽에 있다고 믿습니다.

먼저 시도해 볼 곳은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잡던 시절, 한국은 정답을 가장 빨리 찾는 나라였습니다. 결재선으로 오차를 줄이고, 허용된 것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답이 없는 시대에는 틀리는 속도가 국력이 됩니다. 가장 버리기 어려운 건 크게 성공했던 시스템입니다. 규제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지만, 태어나지 못한 회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실력이 줄어든 게 아니라, 한국이 잘하던 게임의 규칙이 바뀐 것입니다.

다행히 한국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원화 거래소에서 본인 인증을 마친 분이 1,115만 명, 인구의 22%입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거래하는 분은 그중 다섯 명에 한 명꼴입니다. 사람들은 문 앞까지 와 있는데, 문 안에 할 게 없으니 돈이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건 에너지가 아니라 열린 문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가 곧 한국이 가진 기회의 크기라고 생각합니다.

에너지만 있는 건 아닙니다. 한국에는 자리가 있습니다. 한국 수출의 17%는 미국으로, 18%는 중국으로 갑니다. 두 극에 거의 같은 무게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동시에 AI 메모리 세계 점유율 83%, 로봇 밀도 세계 1위, 넷플릭스 비영어권 콘텐츠 1위가 모두 한 나라에 있습니다. 한국은 두 극 사이에 끼인 나라라기보다 두 극이 만나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세상이 둘로 갈라질수록 양쪽이 모두 믿을 수 있는 레일의 가치는 올라갈 겁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각자 하나씩만 먼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책을 만드시는 분들께는 '안 된다'에 날짜를 붙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금융권에서는 첫 온체인 상품과 첫 스테이블코인 정산을, 기업에서는 에이전트에게 열린 API를, 빌더분들은 한국을 첫 번째 시장으로 삼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다 바꾸자는 게 아니라, 각자 한 칸씩만 먼저 가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안 된다'고 하면, 한 번만 물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언제까지입니까?

각자의 한 걸음이 모이면, 동쪽의 작은 점 하나가 세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0년 뒤 세계의 에이전트가 서울에서 첫 신원을 받고 첫 결제를 한다면, 한국은 규칙을 따르는 나라에서 규칙을 함께 쓰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인터넷의 규칙은 실리콘밸리에서 쓰였지만, 에이전트의 규칙이 어디서 쓰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해시드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다음 10년의 규칙을 오늘 이 방에서 여러분과 함께 쓰기 시작해 보고 싶습니다.

실행은 이제 기계가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시작할지는 여전히 우리가 정합니다. 오늘 아침 서울의 해는 6시 24분에 떴습니다. 해는 매일 동쪽에서 뜨지만, 첫 빛은 먼저 일어나 동쪽을 바라본 사람에게 닿습니다. 기계가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사람에게 남는 큰 일 하나는 먼저 시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림이 싸진 시대에 낙관은 가장 합리적인 전략입니다. 낙관론자들의 시대, 그 첫 빛이 닿는 자리. 이스트포인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